2009년 6월 15일 월요일

클리나멘

내 블로그의 이름은

clinamen.textcube.com 이다.

gmail아이디는 clinamen.re.kr 이다.

이 클리나멘이라는 용어는 에피쿠로스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루크레티우스의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클리나멘은 '직선 운동에서 비껴나가는 원자들의 이탈적 운동'을 뜻한다.

이 클리나멘에 대한 주장은 논리학적으로도, 기하학적으로도, 역학적으로도,

물리학적으로도 불합리하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미세한 일탈이 야기하는 소용돌이를 늘 접한다.

베이징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의 태풍을 불러온다는 이야기는

더이상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론적으로 불합리해 보이지만 일상에서는 익숙한 것이 바로 이 클리나멘이다.

맑스는 '제우스에 맞서는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이라고 클라나멘을 칭했다.

들뢰즈는 몰적인 것에 대비해서 분자적인 것을 강조했는데,

대중들의 분자적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분자역학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클리나멘 개념이 작동하며

몰적인 것으로 포획 불가능한 흐름으로서의 대중이 있다.

이런 클리나멘 개념을 통해 대중을 바라보면

대중은 고체가 아니라 액체로, 대상이 아니라 흐름으로 파악 가능하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대중의 흐름에서 클리나멘은

어떤 운동보다 존재론적으로 앞선 일차적인 운동이다.

이러한 클리나멘 개념과 함께 대중은 이제 결정 불가능성의 지대에 놓이게 된다.

흐름으로서의 대중. '결정 불가능한 지대의 대중'.

언제 무엇이 될지 모르는 존재 그것이 바로 대중이다.

대중은 본성을 가지지 않으며, 본성이 없다는 것이 대중의 본성이다.

이제 우리는 라이히의 질문

"대중은 어떻게 자신의 억압을, 자신의 죽음을 욕망하는가?"에  답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대중을 다양성과 생성의 능력으로 이끄는가의 문제이다.

잠재성과 가능성의 흐름으로서의 대중.

이 잠재성을 끓어 넘치게 만들고 폭발시키는 것은  혁명가의 몫이다.

여기서 혁명가는 전위로써의 혁명가가 아니다.

그 자신이 대중인 혁명가이며 자기안에 소수성을 자각하는 혁명가이다.

결론을 가지고 실천을 하는 자도, 도덕적 소명을 가지고 나서는 자도 아니다.

민감하게 자신의 소수성을 자각하고 이를 대중-동료 들에게 전하는 자...

그럼으로써

운동하기때문에 완성될 수 없는 이 끝없는 저항의 사유와 실천에 동참하는 자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것이 내 블로그 제목의 배경이다.

뭐 구지 말하자면

완성에 저항하는 이 끝없는 실천의 흐름위에 내 몸을 맡기겠다는 다짐이고,

또 이 블로그가 나의 감응을 전달하는 장으로 활용되기 발하는 바람에서

이렇게 붙여본 것이다.

내 수준이 지랄같아 내 블로그도 아직 거창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민망한 수준이지만

모르지 이도 혁명의 과정일지...

CLINAMEN.REVOLUTION.KOREA


댓글 2개:

  1. 자기 스스로의 길찾기에

    이 블로그가 좋은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이젠 방학한 대학생이 되어서

    나의 부러움을 온 몸에 사겠군..





    진짜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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