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2일 월요일

시리어스맨

인간이 회피할 수 없는 가장 자명한 진실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그건 죽음이다.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절대명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의 모든 실존적 고민은 이 죽음을 자각하고 마주함으로써 시작된다. 세계에 던져진 존래로써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시리어스 맨>은 이 근본적인 질문을 ‘툭’ 던져 놓고 영화를 끝내 버린다. 기승전결의 일반적 영화문법에 익숙한 관객에게라면 퍽 불편하고 불친절한 영화다.




영화 속 주인공 래리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다. 성실하고, 착실한 삶. 그 어디도 불편해 보이지 않던 그의 삶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아내는 이웃집 아저씨와 바람이 나 이혼을 요구하고, 아들은 코카인을 피워대며 말썽을 부리고, 딸은 코를 성형하겠다며 래리의 지갑에 손을 댄다. 하나 있는 어리숙한 동생은 도박장을 기웃거리고, 래리를 음해하는 익명의 제보자 덕에 무난하리라 보였던 교수임용 심사에서도 난관에 봉착한다. 총제적 난국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 착하디 착한 남자의 일상을 이렇게 공격하는 것인가? 래리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세 명의 랍비를 찾아간다. 절대자는 그에게 답을 줄 수 있을까? 래리는 신의 답변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래리는 해답보다 질문만 안고 신과의 대화를 그만둔다. 이때, 그의 삶을 한 큐에 정리해 주는 한방이 찾아온다. 전화로 이야기하기 곤란하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겠다는 의사의 전화한통. 래리는 현기증 날 것 처럼 머리가 깨끗해지는 것을 느낀다. 래리를 곤란하게 했던 모든 질문들은 이 전화 한방으로 모두 날라가 버린 것이다. 또, 말썽꾸러기 아들의 학교엔 거대한 토네이도가 불어온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질문만 던지던 영화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유도하고 끝나 버린다. 자연의 거대한 힘과 죽음이라고 하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 앞에 인간 군상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거대한 구조적 힘 앞에 인간의 자율성은 힘을 잃고, 삶은 의미를 잃는다. 열심히 살아본들 무엇하겠는가? 래리처럼 불행만 겪다가 죽음을 맞이할 텐데...영화의 끝에, 덮쳐오는 허무주의를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나는 김훈이 말하는 그 힘의 세계가 보다 근본적인 우주의 질서라는 사실에 동의하며, 그래서 우주적 원근법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현자들에게 모종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 현실의 장에서 분투해야하는 나는 결국 정치적 보수주의로 귀결되고 말, 이 허무주의를 인정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상 그대로에 대한 인정과 받아들임이 아니라 허무주의를 극복한 긍정의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나가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세상에 어떤 답이 존재할까? 아마도 없다는 것이 가장 적절한 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린 답을 찾아가는 물음을 중단할 수 없다. 이 물음을 중단하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세, 그 자체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좋은 예술작품은 좋은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질문을 생성시키는 영화이고, 그 질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롭게 영화텍스트를 분석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시리어스맨>은 수많은 질문을 낳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래서 수많은 독해를 유발시키는 영화라는 점에서, 분명 좋은 영화다. 조금 시리어스해지는 것을 감수하고도 볼 필요가 있는 <시리어스맨>이다.





아, 이 착한 남자의 일상은 왜 이리 꼬여만 가는가?